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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리그파

잠재의식을 변화시키는 도구는 상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상상을 통제하여 사용한다면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잠재의식을 움직이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법칙이 일반화되기 전에는 소수만이 알고 있었을 것이고 법칙이 주는 자유도 소수만이 누렸을 겁니다. 그 소수는 자연의 현상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시절에도 유심히 자연을 관찰해서 그 원인과 결과에 대한 현상을 깨우친 선구자입니다.

그 이유는 잠재의식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력이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비록 지금 우리는 그것의 활동을 인식하지 못하지만 아주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고, 그 활동은 우리의 삶에 아주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큰 영향력이라는 표현조차도 잠재의식의 영향력을 설명하기에는 많이 부족합니다. 오히려 삶을 좌지우지하고 있다고 하는 편이 적당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며 내리는 현재의식의 결정 배후에는 잠재의식이란 것이 숨어 있습니다.

최면은 잠재의식의 즉각적인 변화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잠재의식의 변화가 일어날 때 외부에서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관찰해본다면 잠재의식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잠재의식은 현재의식과는 다른 것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내면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모두 인식대상으로 하는 것은 아니고, 진심으로 사실이라고 받아들인 것만을 대상으로 합니다.

그래서 잠재의식을 변화시키키 위해서는 새로운 것을 사실로 받아들여야만 가능합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어떤 새로운 것을 진심으로 사실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을 방해하는 최고 주범은 이성과 감각입니다.

이성과 감각의 활동이 둔화되었을 때 새로운 암시를 준다면 잠재의식을 빠르게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후최면암시란 피암시자에게 최면에서 깨어나면 일정한 행동을 하라는 암시를 거는 방식입니다. 그러면 피암시자는 최면상태에서 깼을 때 암시된 행동을 하게 됩니다.

이 최면실명 조금 무섭지 않으셨나요? 왜냐하면 순수한 자유의지로 한 행동인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 실은 누군가의 암시를 통해 잠재의식에 새겨진 하나의 인상이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잠재의식에 하나의 인상이 새겨진다면 우리는 아무런 의심 없이 그일을 행하면서 현재의식만의 수수한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잠재의식을 변화시키기가 힘들지만 어떻게든 변화를 시킨다면, 즉 그것 안에 새로운 인상을 각인시켜 놓는다면 현재의식은 반드시 그 변화를 바깥으로 나타낸다는 것, 즉 새로운 활동을 한다는 겁니다. 잠재의식의 변화는 현재의식의 변화를, 행동의 변화를, 더 나아가 삶의 변화를 만듭니다.

우리는 지금 현재으식만을 나라고 여기고 있는데, 만약 잠재의식의 형성과정에 현재의식이 주도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우리는 모든 주권을 빼앗긴, 그야말로 자유의지가 박탈된 존재처럼 느껴졌을 겁니다. 다행이 잠재의식을 조절하는 권한이 현재의식에게 있습니다.

이제는 이성과 감각이 잠든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 일상에서 잠재의식이 어떻게 변화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크게 지속적인 임시와 반복되는 경험 두가지가 있습니다.

암시가 진실이냐, 아니냐는 문제가 아닙니다. 유일한 문제는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지, 그렇지 못한지의 차이일 뿐입니다.

앞서 말한 지속적인 암시와 지금 말한 지속적인 경험이, 일상에서 잠재의식이 바뀌는 가장 흔한 모습입니다. 일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성과 감각이 활발하게 활동을 하는 중에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특성 떄문에 그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매우 반복적인 경험이나 암시여야 하고, 그 변화 또한 매우 느려 체감하지 못할 정도의 속도입니다.

그래서 몸이 건강해지고 싶은 사람이라면 건강하자라고 하면 안되고 난 건강하다는 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잠재의식의 구조를 모르고 잘못된 명령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잠재의식의 인식대상은 외부 세상이 아닌, 우리가 진심으로 사실이라고 받아들인 내면 세상이라는 것을 반드시 유념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현재의식이 전해주는 외부의 정보만을 진심으로 사실이라 받아들일 이유는 없습니다. 즉 보고 듣는 것만을 진심으로 사실이라 받아들일 이유는 없습니다.

원래 어떤 결심도 잠재의식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의지가 상상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가 진심으로 사실이라 받아들인 것만이 잠재의식에 각인됩니다.

애써서 어떤 모슴으로 나타내고 있는 시간은 진정한 변화가 아닙니다. 나에 대한 관념이 진정 그 모습으로 변해서 아무런 애를 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표현되어야만 진정한 변화입니다.

우선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잠재의식과 현재의식이 충동할 때면 우리의 현재의식은 계속 억지로 힘을 내면서 애를 쓰게 된다는 겁니다. 반면에 우리의 잠재의식과 현재의식이 일치한다면 우리의 현재의식은 자연스럽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두가지 반응을 통해 나의 잠재의식과 현재의식이 뜻을 같이 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첬째는 우리 안에는 엄청난 힘이 숨어 있다는 것이고, 둘쨰는 우리의 인식의 변화를 통해 그 힘을 끌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앞에 주어진 상황을 어떻게 보느냐, 현실이 보여주고 있는 한계를 그냥 그대로 발아들이고 있느냐, 아니면 그 한계를 넘어선 어떤 기회를 보느야, 이것 역시도 상상력의 힘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나에 대한 관념입니다. 즉 나는 나를 진심으로 어떤 사람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는지가 이 모든 관념의 중심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에 대한 관념이 바탕이 되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 현 경제를 바라보는 시선, 인간관계를 바라보는 시선이 정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에 대한 관념은 잠재의식의 중심입니다.

네빌 고다드의 이론에 따르면 변화에는 세 가지 과정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자아관찰을 통해 자신의 현 위치를 제대로 아는 것이고, 두 번째는 우리가 가고자 하는 위치를 명확하게 하는 것, 그리고 세 번째는 그 위치로 가기 위해 지금 현 위치에서 분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만약 어떤 소문이나 무익한 평가가 한 사람에게 걱정스러운 반응을 일으키는 반면 어떤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런 반응도 일어나게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이 두사람이 서로 다른 의식 상태에서 살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진정한 형이상학자의 길은 어떤 은둔의 길이 아닌, 삶이라 부르는 것 한가운데에 놓여있습니다.

  1. 원하는 바를 명확하게 하십시오.
  2. 원하는 것이 성취되었다면 마주칠만한 사건을 구상하십시오. 그 사건은 여러분 자신이 주인공이 된 행동이어야 하고, 원하는 것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나타내는 사건이어야 합니다.
  3. 몸을 움직이지 말고 잠과 비슷한 상태를 불러일으키십시오. 그런 후에 구생했던 행동을 하는 여러분을 마음속으로 느껴, 소망이 성취됐다는 감각만이 마음을 지배하게 하십시오.

이렇게 확고한 앎이 되었을 때, 즉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됐을 때 결국 잠재의식이 변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두려움의 표현인 후들거리는 다리와 콩닥거리는 가슴은 사라집니다.

그래서 네빌링에서 우선 주의해야 할 것은, 상상은 생각과는 다르다는 겁니다. 만약 생각이라는 것과 비슷하게 사용한다면 아무런 효과도 내지 못합니다.

제가 지금 하고자 하는 말은 네빌 고다드가 현실처럼 느껴질 때까지 상상하라고 말했을 때, 그것이 현실을 보고 듣는 정도에까지 이르러야 된다는 것은 아니란 겁니다. 그저 내가 지금 소망하는 곳에서 소망하는 것을 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정도면 현실처럼 느껴지는 상상이고 잠재의식이 그것을 진심으로 사실이라고 받아들이기에 충분하다는 겁니다.

잠재의식이 이렇게 일인칭에 현재현으로만 받아들이는 속성 때문에 마음 안에서 무언가를 이루려고 할 때마다 그와 반대되는 결과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노력하는 것과 상반된 결과가 일어나는 법칙, 즉 역노력의 법칙입니다. 마음을 다룰 때 가장 조심해서 살펴야 할 법칙입니다.

그래서 네빌 고다다는 자신의 욕망이 가장 불타고 있는 것을 목표로 삼으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얻으려믄 장면이나, 혹은 무언가를 얻는 장면모다는 그것을 사용하는 장면이 더욱 좋습니다. 우리가 역노력의 법칙이란 함정에 빠지는 가장 큰 이유는 이미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악에 저항하기보다는 선에 집중하라는 것은 마음의 법칙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 중 하나입니다.

인생을 길에 비유하면 한 명은 길을 걷다가 돌부리에 넘어집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걸 두고 계속 신경을 씁니다. 누가 이런 것을 이런 곳에 두어서 나를 넘어지게 만들었는지 그리고 왜 이런 것들이 이 길 한가운데에 있는데도 치우지 않았는지. 아니면 왜 나는 이걸 미리 못 봐서 넘어졌는지? 스스로에게 자책할 수도 있겠죠. 어쨌든 이 사람은 그 돌부리 앞에 계속 서 있는 겁니다.가던 길은 잊고 그냥 멈춰버리는 거죠. 설사 가다가도 다시 뒤를 돌아보고는 또 원망, 자책합니다.

그런데 다른 한명은 똑같이 돌부리에 넘어집니다. 하지만 툭툭 털고 일어나 가던 길을 갑니다. 그냥 길을 가다보면 이런 돌부리는 앞으로도 많이 있을 거고 넘어질 때도 많은 거라 생각하면서 그저 가던 길을 갑니다.

욕망이 우리 안에 심어지고 우리가 그것을 실현하는 것은 씨앗이 심어져 꽃을 피우는 것과 같은 자연의 일입니다.

그가 그렇게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마음 안에 한계를 지니지 않는다면 그 어떤 한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모습은 올바른 상상을 통해 욕망을 조금이라도 죽인후에 그 일은 이루어졌다고 믿고 대담하게 돌아서는 것입니다.

저항은 저항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것을 이겨내고 있는 힘에 대한 증명이 목적입니다.

상상은 시간과 반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시간 동안 얼마나 소망이 이루어진 상태에 깊숙이 빠져 사실로 받아들였냐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나의 마음 역시 이것과 비슷합니다. 처음 새로운 느낌이나 새로운 생각을 해보면 어색하고 낯섭니다. 하지만 그 후에 다시 한 번 떠올린다면 처음보다 익숙해 집니다. 그렇게 계속 반복하면 마음 안에 그 생각으로 이어지는 길의 자취가 뚜렷해집닏. 결국 마음에 하나의 트렉이 완성되는 겁니다.

생각에는 관성이란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멈추어 있는 돌을 굴릴떄는 큰 힘이 들지만 한 번 관성이 생긴 돌을 굴리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것처럼 원망이라는 생각에 관성이 생겨버리면 저절로 굴러가는 원망에 내가 끌려갑니다.

감사한 것들, 과거에 좋았던 기억들, 암에게 어떻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 가슴을 뛰게 만드는 생각, 진취적인 생각, 바라는 것이 이루어졌을 떄의 계획, 이런 것이 계속 마음의 트랙을 돌고 있는 사람의 마음은 점점 좋은 것들로 채워지게 되고 점점 더 좋은 기분을 유지하게 됩니다.

생각을 잡으려 하지 말고, 생각에 사로잡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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